니진스키의 페트루슈카(광대) 역을 위한 브누아의 무대의상 스케치(1911) / via 로쟈


물 속에서 산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물을 이용하여 살고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닫자 환멸스럽다. 참치의 아가미는 숨쉬지 않는다던데, 그냥 벌리고 달리면 어차피 노다지로 많은 물이 폐부로 쏟아들어와 생명에 기름칠하는 거, 그거 시골마을의 3만원짜리 오입질과 뭐가 다른가? 그가 꾸준히 달리는 것은 칭찬할 일인가? 그러한 생활방식이 생태피라미드의 상위에 참치를 위치시킨다는 것, 그가 거대하고 매끈한 몸매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다른 사람에게 인생은 다 그런 것이며, 실존의 무게를 이고 아프지만 계속 걸어가자고 다독이는 일에 지쳤다. 나는 평생 내 무게는 커녕 남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 이끌 기회가 있을까? 아니 그래야 하는 건가? 나는 살아야겠으니 소량의 살아있다는 감흥을 주사하기 위해 뛰는 척 하는 것보다는 매일 인스턴트 음식과 맥주로 저질스럽게 여름을 넘기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한다. 도시에서는 다들 그런다. 특히 잔인한 도시에서는. 길에서 예쁜척하는 여자들을 보면 뺨을 후려갈기고 싶다. 어떤 정례적인 모임으로 초대하는 문자에 전혀 문명인답지 않은 태도로 답문을 보내보고 싶다. 나는 진보주의자도 아니고, 개인주의자도 아니고, 시장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고, 그냥 누가 광대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 자기 얼굴을 처음 만난 것처럼 쳐다보는 저 수척한 광대. 타인을 위해서만 기뻐하고, 집에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금붕어 같은 것을 키우는 녀석. 그러다가 죽기 전에 금붕어에게 밥을 주고, 괴롭힌 사람들을 한 번씩 안아준 뒤, 자신의 정원을 손질하고 머리를 처음으로 단정히 빗은 후 하얗게 표백된 순면 침대에서 세상과 작별하되, 천국 따위는 없어도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광대. 어제 지영 누나네 할머니 장례식 갔다가 돌아오는 길, 망원동 골목에서 한 사내가 소주병을 쥐고 골목에 쭈그려 흐느끼고 있었다. 집에 와서 그를 위해 울었다. 그는 광대이다.

나는 여름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