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봉의 글을 읽고 씀

트롤리 문제에 대해서, 줄리언 바지니의 아주 재밌는 책 <유쾌한 딜레마 여행>이 생각이 났어. 이 책은 윤리적 난제를 주제별로 잘 엮어 보여주고 있는데, 바지니 주장의 맥을 따라가면서 내 생각을 정리해볼게. (근데 이 책... 화장실에 뒀더니 곰팡이가 장난 아냐)

<가정>
레버만 당기면 40명 대신 5명만 죽도록 열차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당신은 레버를 당길 것인가?

1. Yes : 당연히 레버를 당겨야 한다는 주장은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에 가깝다. 당연히 40명보다는 5명이지! 물론 공리주의자가 아니라도 결국은 레버를 당길 사람은 많을 거야. 제 정신이라면 레버를 당겨야지! 미쳤어? 40명이 죽게 놔둘 셈이야? 

2. No : 생명을 죽임으로써 생명을 구할 권리는 어떤 신적 권리에 대한 도전이야. 미끄러운 경사 이론에 의해, 만약 이런 식으로 공리적 관점에 따라 차악으로 최악을 막는 윤리적 행동을 정당화하면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굉장한 악을 용인하면서 최악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을 거다. 

3. Yes : 세상에 선악의 대결은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 겪는 일 중 완전한 선한 일과 완전한 악한 일이 있을까? 우리의 삶은 매일 '레버를 당기는 것'과 같은 끔찍한 선택을 요구하는 것. 그 중 가장 악한 것은 레버를 당기지 않는 것과 같이 방관을 가장하여 '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레버를 당기는 것은 함부로 개입하여 자연스러운 진행을 바꾸는, 그리하여 신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에게 현세에서 폭력적으로 주어진 선택이다. 당기고 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당기지 않아도 그는 그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이 책임의 문제를 생각할 때 안 당기는 것이 더 괜찮으며 편안한 '선택'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독이 든 병을 마시는 친구를 보고만 있는 것,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하루 2달러로 생활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 모두 딱히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상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책임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레버를 당기지 않아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게 아니다!

4. No : 죽이는 것과 죽게 두는 것 사이에 아무런 윤리적 차이가 없다고 말하다니 매우 이상하다. 살인과 안락사는 윤리적으로 정말 동일하게 나쁜 것인가? 정말 가난한 나라의 가난에 우리가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편의점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물병들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다고? 이런 종류의 인식은 물론 지금의 세태가 불합리하다는 점을 잘 부각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윤리적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딜레마를 양산한다. 

 5. Yes : 나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은 있지만 그대로 의도가 선하면 윤리적으로는 괜찮다는 인식은 가톨릭 신학에 기대어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이중효과(double-effect)의 원칙은 예상과 의도를 구분한다. 예상과 의도는 다르고, 중요한 건 의도이다. 똑같이 황산모르핀 20 밀리그램을 주사한다고 해도, 안락사를 의도하면 불법이고 잠시 고통을 잊게 할 의도이면 합법이다. 똑같이 레버를 당기는 행위지만 40명을 살리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다면 5명이 죽게 되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행위의 윤리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다. 

6. No : 어설픈 윤리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데 '의도'의 윤리성을 부각시키는 것만큼 자주 이용되는 것도 없다. 5명을 죽게 했다는 자책을 덜기 위해서 이중효과에 기대는 것인지, 정말 40명의 생명을 죽게 둘 수 없는 숭고한 목적 때문에 5명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조치를 취하려고 한 것인지는 레버를 당긴 주체가 자신의 양심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만약 오히려 전자에 근거한 행위이고, 그 자신마저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어쩔 건가? 게다가 의도와 예상은 언제나 양분되는 것이냐?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숲을 향해 총을 쏜 다음 사람을 죽게 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나? 사고로 누군가 총에 맞아도 윤리적 책임은 나에게 돌아온다. 이중효과의 원칙을 경솔하고 노골적인 공리주의적 계산에 이용하지 말라. 

7. Yes : 만일 내가 포로인데 다른 포로를 강간하여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경우 나는 그를 강간하여 살해하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강간당하여 더욱 처참하게 살해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내가 하는 어떤 행위는 윤리적으로 선하지 않다. 그러나 나의 행위는 나쁜 일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가장 덜 나쁜 결과를 향해 어떤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어떤 행위도 취하지 않아서 가장 나쁜 윤리적 결과를 낳는 것보다 부도덕한 어떤 일을 택하여 가장 덜 나쁜 길을 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나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행동은 나쁘지만, 부도덕한 선택 사이에서 최선을 다하는 어떤 행위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8. No : 세계가 복잡하고 매 순간이 선악의 양자택일로 이뤄지지 않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차악을 선택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윤리적으로 긍정적 검토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수많은 '차악'들을 정당화하는 데 더 많이 이용되어왔다.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의 '어쩔 수 없었다'는 증언을 들어보라! 차악은 차악에 준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 또한 5명의 목숨을 수단으로 했다면 40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그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는 레버를 당기지 않아야 했다. 40명이 죽고 그도 윤리적으로 자책감에 밤마다 괴로웠겠지만, 이것이 유일하게 윤리적 행위이다.

9. Yes : 레버를 건들지 않아서 생기는 윤리적 고결함은 과연 40명을 구하고 고통스러운 것보다 고결한가? 윤리란 모든 사람에 대한 동등한 수준의 존중에 근거한다. 벤담은 "모든 사람은 한 사람으로 대우받아야 하고, 누구도 한 사람 이상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0. No : 공리주의의 문제를 떠나 이것은 더욱 윤리적인 행위를 향한 어떤 주체가 행하는 실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5명 중 딸이 있다면 레버를 당기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는 윤리적 행위를 취하는 것이 옳다. 단순히 40이 5보다 크다는 수학적인 계산에 의거하여 윤리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레버를 당기지 않아서 고결함을 유지하는 것은 윤리적 결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지만 나름의 이유에 근거하여 내린 매우 실천적인 행위이다. 

11. Yes : 물론 주체와 대상의 관계설정에 따라 모든 윤리적 상황은 재해석될 수 있다. 어느 부모든지 5명 중 자신의 아이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레버를 당기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40명을 포함한 45명의 부모, 즉 레버를 당길 선택권이 있는 45명의 주체의 입장에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자식을 걱정하는 한 주체의 지극정성과, 다른 아이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함부로 넘어서 이 딜레마에서 레버를 당기지 않는 행위가 윤리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 주장이 아니다. 여기서 작동하는 기본 원칙은, 타인보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더 많이 애정을 집중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할 수 있을 때에 한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 가족과 친구의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5명의 목숨을 수단으로 하여 40명을 구하는 것 또한 잘못이지만, 5명을 위해 40명을 수단화하는 것도 대단히 비윤리적이다. 

12. No : 글쎄,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하나의 주체의 입장을 떠나서 어떤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주체의 구체적 상황을 떠나서 공평무사한 결정을 내리라는 원칙은 그 자체로는 매우 정의로우나 실천에 써먹을 수 있는 지침이 전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다른 아이들은 굶어죽는데 내 아이에게 꼭 있지 않아도 되는 장난감을 하나 더 사주는 일,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들은 전혀 써먹지 못하는 구청 영어도우미 웹사이트를 이용하여 내 아이의 성적을 높히는 일 등이 모두 불공정해진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혹은 자신의 딸이 저 45명 중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윤리적 선택(레버를 당길지 결정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편하게 인정하는 것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가족과 좁은 의미의 윤리적 상황이 없는 어떤 무색무취의 공평무사한 차원을 가정하는 순간 끝도없는 딜레마만 양산될 뿐이다. 




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회퍼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해. 왜냐하면 그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손가락질하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이 계명은 전쟁이라는 구조악에 대한 금지에 가깝다)...

1930년대 초에 본회퍼에게 있어서 히틀러는 어떤 악한 행위자가 아니라 이미 '악'이었다. 본회퍼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악한 행위자와 악 그 자체를 구분함으로써 계속하여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는 직관과 관련된 것 같아. 본회퍼의 비유 중 유명한, 나쁜 운전자를 저지하여 운전대에서 끌어내려 나머지 버스 승객을 구하는 행위는 어떤 경건한 묵상보다는 매우 직관적인 관찰에서 즉각적으로 도출된 것으로 보이거든. 물론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악한 뚱보(the fat villain)를 밀어버리는 일을 정당화하면 미끄러운 경사면에 놓일 확률이 높기는 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뚱보의 악함을 폭력적으로 저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단순히 그것이 위력행사의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하여 윤리적으로 경멸하는 태도 또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지. 모든 혁명적 행위의 진정성은 역사 안에서 매우 천천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지... 본회퍼는 자신이 윤리적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나쁜 짓(차악)의 불가피함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 인간의 선택이었을 뿐. 내가 보기에는 악한 뚱보를 실천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위선에 빠지게 되는 위험보다, 오히려 눈과 귀를 가리고 살며 대단히 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적 타락이 더욱 경사면에 놓여있다고 본다. 머지않아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하여 다시 한 번 민주주의 무용론이 크게 일어나게 될 때, 모든 승객은 버스에 앉아 벼랑으로 달리는지도 모르고 pmp에 담아온 포르노를 보며 히히덕거리고 앉아있을 것이다. 

물론, 이 트롤리 문제가 더욱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뚱보가 악한이 아닐 경우이기 때문이지. 우리가 이런 극단적인 딜레마를 죽기 전에 만날 확률은 거의 없지만, 아마 계속 고민해야 하겠지. 

적어도 레버를 당기지 않는 일이 내 손의 피를 보기 싫어서이거나, 레버를 당기지 않은 후 아무 짓도 안했기 때문에 나는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윤리적 무감각만이라도 벗는 게 소원이야.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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