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호승, 서울을 가르치다.
1999년 가을이었다. 나는 대학 기숙사 방에서 가끔 "서울의 예수"를 읽었다. 1982년에 세상에 처음 나왔던 이 책은 서울 생활을 갓 시작한 스무살 남자의 경전이었다. 가장 외로운 순간에 정호승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건조한 성경 구절 하나, 소주 한 병이 하지 못하는 위로를 종이가 누렇게 뜬 책 한 권 따위가 해주었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 그 책을 펴면 시인 하나가 찌질하게 혼자 막걸리 한 사발을 따라 마시면서 서울 사는 보통 사람들의 꼬락서니가 가여워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가만히 옆에 앉아 같이 울었고, 그러면 마음이 따뜻해졌다.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 정호승, "서울의 예수",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95년, 46쪽.
그리운 미친년 간다.햇빛 속에 낫질하며 간다.쫓는 놈의 그림자는 밟고 밟으며들풀 따다 총칼 대신 나눠주며 간다.- 정호승, "유관순 1", 위의 책, 85쪽.
그가 그리는 서울에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도 가난해서 행복한 아버지가 살고, 염천교 아래에서 내 힘으로 벌어먹어보려는 소년이 구인벽보를 읽는다. 빵이 부족할 때는 물이 없고, 물이 부족할 때는 빵이 없는 이 슬픔 가득한 도시에서 봄을 기다리며, 예수는 술에 취해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서 뭐가 그리 서러운지 사람들 생각을 하며 펑펑 울고 있다. 어느 꽃다운 처녀는 싸우지들 말라며 총 대신 풀을 나눠주며 눈부시게 춤을 춘다. 인간이 싫지만, 인간을 버릴 수 없는 서울. 정호승은 이 도시를 가르쳐주었다.
2010년 내가 사는 망원동엔 요즘에도 공동화장실을 쓰는 곳이 있다. 그 쪽 사람들은 일요일 저녁볕에 가끔 나와 값싼 돼지고기를 구워먹는다. 하루종일 시멘트를 발랐는지 더러워진 바지채로 깔고 앉은 사내가 아까운 고기를 동네 개도 한 입, 가슴 큰 할머니에게도 한 입 던져넣고, 지나가던 주정뱅이에게도 한 잔 받으실라우 묻는다. 염천교에는 이제 거지 소년은 없지만 아직도 그늘진 서울의 냄새는 옅은 저녁에 고기냄새를 타고 어디선가 피어오르고 있는 거다. 극복해야 할 객관적 소외로서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이 어찌 다른 문제일까? 잘 안 보일지는 몰라도 오늘도 감자탕 홀서빙하는 누구의 어머니 무릎은 삭아가고, 소주 한 잔에 눈물이 왈칵왈칵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의 시간은 달리고 있다.
여튼. 그 서울에서 벌써 10년 살았다. 그 시인 덕에 내가 아직 뭘 몰랐을 때, 나는 그가 그린 서울을 보면서 내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걸 절절히 알게 되었더랬다. 난 요즘도 생각한다. 학교에 "00는 만화 좋아하는 오타쿠이고, 00가 졸라 빡쳐서 누구를 찔렀으며, 연예인 쌍커풀 수술 괜히 했다"는 얘기를 하는 데 귀중한 칼로리를 낭비하는 십대들이 가끔 있지만, 그 어린 입이 천박하다기보다는 그냥 그 인생이 슬플 뿐이다. 소수적 관심을 보듬지 못하는 지 못난 마음씨 하나 깨닫지를 못하고, 남이야 포크로 누굴 찌르든 정작 내가 미운 사람 얼굴 하나 마주하며 용서하지 못하는 그 찌질함이 더 문제라는 걸 느끼게 될 인생의 외로운 순간을 어서 저 년에게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까 하다가 그냥 관둔다. 걔도 살다보면 알겠지. 골프를 치고, 쌍커풀이 예쁘고, 졸라 성격 좋은 인간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걸. 너도 그럴 때 정호승이 슬픔에 관하여 쓴 시를 읽어보라고 말해줄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는.
2. 서울을 위해 울지 않는 정호승.
그런데, 2010년 4월, 나는 정호승 때문에 한참을 방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것은 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자신의 글에서 "울기보다 다짐하라"고 당부했기 때문인데, 대체 이 여린 시인은 언제부터 서울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울어주기로 한 걸까? 신형철은 정호승의 동아일보 기고문에 대해 "감정에 호소하는 시가 그 강력한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면 '개개인의 혼 안에 나쁜 통치체제가 생기게끔 한다'"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며 그를 비판하고 나서기도 했다(2010.5.14 @한겨레21).뭐 물론 플라톤의 저런 말이야 때에 따라서는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 성격이야 살면서 바뀔 수 있다. 박노해는 제 살의 문신을 피가 나게 벅벅 긁으면서 사진전이나 열고 있고, 91년 굿판 걷어치우라고 한 뒤 노무현 죽자 사람들 따라 죽을까봐 걱정하는 김지하, '광주사태' 말실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젊은 날을 자신의 책과 함께 보낸 사람들이 헌책방에 책 팔러 가게 만든 황석영.... 모두모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삶에 비하면 뭐 난 소시민이니까. 그들은 그래도 힘들게 살며 꿈을 꾼 사람들 아니던가? 흑백논리로 좌우를 재단해서 변절자라고 찔러대선 안된단 말이지. 다만 유시민 말마따나 그들이 맞고 틀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부정하고 저주하는 편에 아직도 고민하며 서있는 사람들에게 은연중 죽음을 덧씌우는 경박함이 문제인 거다. 여튼... 요즘 문화 운동 많이 하잖아? 설마 박노해랑 김지하랑 황석영이 그냥 거기 붙어먹고 싶어서 간 거겠어요? 모르잖아요. 물론 진중권은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라고 김지하를 향해 고개를 젓지만..허허.. 헬륨풍선처럼 가벼워져 오늘도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그 작가들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이거다... 그들이 촛불을 "문화운동" 이상은 아니고, "광주사태"도 그냥 영국처럼 민주주의 사회가 발전하면서 다 겪는 통과의례일 뿐이라고 할 때 그냥 "아 엊그제는 다르게 말하더니, 나름 고민하고 저런 결론을 내렸나보다." 하고 믿어주자. 아, 어떤 이는 촛불 들었다가 군화에 밟히고, 어떤 할머니는 아직도 죄책감에 80년 5월에 죽은 자식 묘 앞에 꽃 하나를 두러 가지 못한다는데, 다들 그렇게 늙그막에는 현실 운운하면서 자신의 정신분열과 피곤함을 이유로 현실을 으쌰으쌰 밀기보다는 풍선 타고 하늘에서 문화운동하기도 하고, 아 인생은 원래 그렇게 뭐 같은 거구나. 내 나이 서른. 나이 먹는 게 악몽일 수 있구나.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정호승은 아닐 줄 알았다. 그 사람은 그냥 할아버지가 되어도 들풀 하나에 훌쩍훌쩍 순수한 노인네가 되어줄까 생각했던걸까... 조갑제 밑에서 일한 게 뭐 어때서, 여리고 소박한 시인이야. 그런 사람도 한 명 있어야 돼..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인간적이고 여린 정호승이 그 동아일보 글에서 울분에 취한 이유가 생각보다 여리지만은 않다.
1) 적과 싸워보지도 못한 게 분해서
2) 원수를 값아야 하니까
3) 분노 앞에 조심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이므로
이 쯤 되면 수능 강의에서 정호승의 시에 드러난 슬픔을 두고, "슬픔은 우리가 추구할 것이다. 슬픔은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한 슬픔이다. 기쁨은 자기밖에 모르는 기쁨이다." 라면서 정호승은 소외된 민중들의 힘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동아일보 글에 드러난 정호승의 슬픔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며, 응징과 보복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한이기 때문이다.
라고 썼던 이 시인은 이 국화에서 뭘 느꼈는지는 논란일 수 있겠으나, 어쨌든 이런 시도 썼다.
국화에서 제국주의를 증명하는 작업은 개연성은 몰라도 입증 그 자체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한 입으로 노래하는 시인이 장소와 시대에 따라 어떤 눈빛으로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지, 무엇이 애달프다 느끼는지를 관찰하는 작업으로 그 문인을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다. 정호승은 제국주의나 국가주의에 의해서 고용되거나 그것에 의해 적극적으로 굴복한 시인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이제 그가 실제 슬픔에 동감하고 그것을 동감시키는 시만 썼을 뿐, 이 슬픔의 근원과 객관적 개선을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슬퍼하는 것과, 슬픔의 현장에 참예하는 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재주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지만, 슬픔의 현장에 대한 관심은 양심이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니까 그의 소박함의 정체는 무엇이냐?
그런데 그 인간적이고 여린 정호승이 그 동아일보 글에서 울분에 취한 이유가 생각보다 여리지만은 않다.
1) 적과 싸워보지도 못한 게 분해서
연사흘 줄곧 내리는 이 비는 통곡의 봄비다. 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채 서해에 수장된 천안함 장병 46명이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다. 어찌 이 봄비가 새봄을 알리는 생명의 봄비일 수 있겠는가.
- 정호승, "[특별기고/정호승]절망보다 분노하라, 울기보다 다짐하라", 동아일보, 2010년 4월 28일.
2) 원수를 값아야 하니까
마음속으로 '대한민국은 당신들의 원수를 반드시 값아드리겠습니다'라고 고쳐 읽어본다. ...(중략) ... 시신 없는 영결식에 정말하기보다 분노해야 한다. 눈물을 흘리기보다 분연히 결의해야 한다. 주검으로 돌아온 천안함 장병은 국민과 대통령의 눈물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단호한 응징을 원한다.
- 정호승, 위의 글.
3) 분노 앞에 조심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이므로
마치 북한이 칼자루를 쥐고 남한이 칼날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칼자루를 쥔 자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칼날을 쥔 자는 계속 피를 흘릴 수 밖에 없다. ...(중략)... 부처님은 어디선가 독 묻은 화살이 날아와 허벅지에 박혔을 때 먼저 그 화살부터 빼라고 하셨다. ...(중략)...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도 물증을 찾아야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우울하다. ...(중략)...어떤 이는 그럴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남북관계를 화해무드로 애써 조성해 놓았는데 이명박 정부가 그 무드를 해치는 바람에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그래서 원인 제공은 이 정부의 잘못된 대북정책에 있다고. 설령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북한은 우리 장병을 저렇게 떼죽음 당하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왜 북한의 잘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잘못부터 먼저 생각하는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천안함 사건만이라도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 정호승, 위의 글.
이 쯤 되면 수능 강의에서 정호승의 시에 드러난 슬픔을 두고, "슬픔은 우리가 추구할 것이다. 슬픔은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한 슬픔이다. 기쁨은 자기밖에 모르는 기쁨이다." 라면서 정호승은 소외된 민중들의 힘을 인식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동아일보 글에 드러난 정호승의 슬픔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며, 응징과 보복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한이기 때문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라고 썼던 이 시인은 이 국화에서 뭘 느꼈는지는 논란일 수 있겠으나, 어쨌든 이런 시도 썼다.
지극히 고운 것이,, 벗아우리 형제들의 피로 물든 꽃자줏빛 바다 위에일어나려 아릉아른 발버둥을 치도다.(중략)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벗아, 그리운 벗아,- 서정주,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
국화에서 제국주의를 증명하는 작업은 개연성은 몰라도 입증 그 자체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한 입으로 노래하는 시인이 장소와 시대에 따라 어떤 눈빛으로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지, 무엇이 애달프다 느끼는지를 관찰하는 작업으로 그 문인을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다. 정호승은 제국주의나 국가주의에 의해서 고용되거나 그것에 의해 적극적으로 굴복한 시인은 아닐지 몰라도, 나는 이제 그가 실제 슬픔에 동감하고 그것을 동감시키는 시만 썼을 뿐, 이 슬픔의 근원과 객관적 개선을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슬퍼하는 것과, 슬픔의 현장에 참예하는 것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재주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지만, 슬픔의 현장에 대한 관심은 양심이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니까 그의 소박함의 정체는 무엇이냐?
그러나 정호승의 소박성은 이런 소박성이 아니다. 누군가가 봐주기를 원하는 소박성이다. 아니 이런 소박성을 알아보는 “나”가 시의 중심에 서있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소박하지 않고 추상적인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간 낭만주의적 운동의 산물이다. 마치 베르테르가 동생들에게 빵 썰어주는 로테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세상은 멀리하고 자신에 도취되는 행위의 산물이다.
- 블로거 ou_topia, "천안함 침몰과 정호승. 그리고 진보와 지적활동. 그리고 소박성"
3. 난쏘공과 겹치기.
희미한 영안실 형광등 불빛 아래
시인들이 편육 몇 점에 술을 마신다
언제나 착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고
죽음은 용서가 아니라고
사랑도 어둠이었다고
- 정호승, "시인들이 술 마시는 영안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작과비평사, 1999년, 61쪽.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힘, 2000년, 217쪽.
"가난뱅이를 두들겨 패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이제 그만 해야 돼. 그러면 안 돼.비정규직 상상도 못했지. 그런데 비정규직이 850만이야. 20대가 학교 나와도 갈 직장이 없어."
- 조세희, 2009년 1월 용산현장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중.
그래서 10년 전에 영안실에서 술 마시던 한 사람은 오늘날 신문에서 누가 죽었다니까, 이젠 편육이 아니라 다 총으로 죽이고 싶어졌고, 10년 전에 폭력의 본질을 진지하게 추적하던 한 사람은, 소득이 없을지언정 질문하는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둘 중 누가 영혼을 잃어가는가?
4. 정호승의 범주
뭐 그래도 시인 자신의 정치적 행보와 달리 여전히 정호승이 말하는 "슬픔이 기쁨에게"는 아름다울 수 있다. 시인 고은은 한편에서는 철저히 현실에 참여하고자 하는 진짜 시인이었고, 문화권력 논쟁 당시 다른 편에서 바라보기에 따라 색깔이 다를 뿐 같은 양의 권력을 추구했던 가짜 문인이었다. 보통 타인의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배가 아파서 그런 거라지만, 고은의 경우 전태일을 보고 고은이 현실에 눈을 뜬 건지, 전태일을 팔아 오늘날 한 자리 하게 된 것인지 애초 그의 의도와 속내야 논쟁이 계속되도 그 마음 길을 알 수는 없다. 사실 누가 정의의 편이고 누가 장사치인지는 관심 없다. 게다가 난 고은의 시를 읽으며 별로 감동해본 적이 없어서 고은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탓하거나 이해할 입장도 아니다. 요컨대 문인 자신의 진정성은 알 길이 없고, 그의 문학성은 시대가 판별할 것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다음과 같은 범주를 설정하는 건 또 과연 타당한가? 나는 오늘 1980년대의 서울의 예수를 놓고, 그 시가 아직도 유효한지를 물으며 정호승의 시는 영원히 막걸리 마시는 예수의 편에 미학적으로 오롯이 설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 못하겠다.그러나 역사적으로 한 개인의 삶의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상대적이고 지극히 우연적일 수 있는 단편적 전기(傳記)를 놓고 문학을 운운하는 것은 문인이 추구하는 '문학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인생은 짧고 문학은 길다" 미당은 타계했고 미당의 인생은 상대적이지만 미당의 시는 계속 읽히고 있다. 따라서 절대적인 속성을 지닌 미당의 시를 상대적인 미당 인생의 단편을 동원해 비평하는 일은 상대와 절대의 범주구분을 잘못한 범주착오(category mistake)에 해당된다.
- 이성원, "고은 시인의 미당 비판은 '부관참시'", 오마이뉴스, 2001년 05월 20일.
5. 정호승의 근황
요즘도 정호승 시인은 각종 행사에서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시를 낭독하거나, 시를 강의하고 다니고 있다. 특히 예수를 강의하고는 하는 거 같은데...
서울의 예수든 웨스트민스터의 예수든 팔레스틴의 예수이든 오늘날 이 단어를 팔아먹지 않고 순수하게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어느 쪽에 있든 그 해석 작업을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은 있겠지. 문제는 우리는 순수하게 예수를 따른다, 너희는 예수를 팔아먹는다 혹은 정치적으로 이용한다의 프레임과 누가 정의의 편인가가 아니라, 너는 뭐할라고 예수를 팔아먹는가.. 너의 정치적 목적은 어디에 닿아있는가?라는 욕망을 솔직하게 해체하는 것 아닐까. 장사해서 돈 벌면 뭐할거냐고 물었는데, 왜 품질 좋은 우리 제품을 모욕하냐고 열받아하는 것. 제품과 장사꾼을 혼동하는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를 범하지 말라며, 뭐 할라고 만든 건지는 몰라도 이 물건 끝내준다고 주장하는 것. 나는 비록 내가 파는 제품을 제품이 아니라 내 생명으로 여긴다하더라도, 그것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매우 분명하고 짧게 대답할 수 있어야한다. 나는 예수에 관한 시를 썼다. 나의 예수의 특징은 추운 겨울에도 봄을 기다리며 걷는 희망이다. 이 희망이 뭐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것은 대한민국 장병들이 북한 어뢰에 숨졌다고 우리 정부가 싸인펜을 증거로 발표했을 때, 그저 슬퍼하기보다는 북한에 총을 겨누는 응징과 보복의 예수. 바로 대한민국 만세 희망의 봄을 알리는 예수이다... 이렇게 말이다.
젊은 날보다 살이 부쩍 찐 정호승씨에게 묻는다.
늦은 오후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높은 창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내 앞에 눈부시다모든 색체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나 아직 알 수 없으나스테인드글라스가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이제 알겠다내가 산산조각이 난 까닭도이제 알겠다- 정호승, "스테인드글라스"
이런 시를 읽어주며 믿음 좋은 신자들을 위해 "인생이 조각났다 하더라도 아름답기 위해서 고난을 겪는 거라고 생각하며 참자"고 권면하는 당신. 이어서 "우리가 눈길이라고 생각하면 봄길도 봄길이 아니"라며 끝내 사랑하는 마지막 사람으로 남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라고 역설하는 당신은 지금 리바이어던의 똥구녕을 위한 봄날을 예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저 슬퍼하고 아름다워한다고 깨진 유리가 다시 붙나? 당신의 기도는 노예선에 팔아넘길 목숨을 잔뜩 싣고 오늘도 무사히를 위해 소박하게 기도하는 선장과 무엇이 다른가? 어둡게 소박한 당신보다는 어쩌면 사탕맛 시를 쓰는 원태연이 낫다. 먹어도 목마를 뿐이고, 도서관 주부 노래교실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당신의 시를 읽지 않겠다.
(2010년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