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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
이 연구에서 사회철학과 사회학은 신학에 봉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오직 이러한 접근(사회철학적, 사회학적 접근)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기독교회의 공동체-구조의 조직적인 이해를 획득할 수가 있다. 이 작업은 종교사회학의 훈련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적 철학과 사회학의 이슈가 진정 신학적 이슈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의 이해에 근거해서만이 대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많은 연구가 신학에 대하여 사회학적 범주의 중요성을 고려할수록, 모든 기초적인 기독교 개념의 사회학적 의도가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인격(person)’, ‘최초의 상태’(primal state), ‘죄’, 그리고 ‘계시’가 사회성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어 진다. 만약 진정한 신학적 개념들이 특별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성취되고 수행된 것으로서 오직 이해될 수 있다면, 교회의 사회학적 연구는 특별한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2. 사회철학과 사회학의 정의에 관하여
사회학은 이론적 구조를 세우는 것에 사회철학과 관련이 있으며, 사회철학은 사회학의 지속적인 모범을 제공한다. 이 두 학문분야는 자연과학이 아닌 인간학에 속하며 보다 독립적일수록 둘 다 분명한 주제를 가져야 한다. 사회철학은 경험 공동체의, 공동체를 위한 모든 지식에 의해 전제된 기초사회관계를 다룬다. 사회철학은 인간 정신 속의 사회성의 기원들, 사회성과 정신의 본질적인 연결을 다룬다. 사회철학은 사회성의 원초적 존재방식을 연구한다. 사회학은 경험 공동체의 구조들을 연구한다. 이것의 실제 주제는 사회들이 존재가 되는 법칙이 아닌 경험사회형태의 본질적 구조 원리들이다. 이러므로 사회학은 역사적 질서가 아닌 체계적 질서이다. 이 한계 인식을 가지는 한 원칙적으로는 사회철학의 기초 없이도 사회학이 가능하다. 사회학적 전망은 형태학적이거나 서술적이지 않고 인문주의적이며 영혼 그룹의 현상의 본질적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현상학적 연구 방법은 사회학의 체계적 본성에서 나온다. 오직 현상학적 방법만이 유전학적 접근을 극복할 수 있는데 유전적 접근은 사회학을 역사의 하위범주로 간주한다.
종교 사회학을 시작하는 것은 종교 공동체의 구조적 특징을 현상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의 공동생활(sanctorum communio) 연구는 종교 사회학이 아닌 신학에 속하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사회학과 사회철학의 전망으로부터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여된 현실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성은 안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지 불참자는 결코 알 수 없다. 자신의 이성이나 다른 유사한 선언에 관계된 것이 아닌 복음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교회를 선언하는 사람들만이 교회의 진실한 본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경험공동체의 구조를 순수사회학부분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우리가 개별적 사회원자론에 대한 근본적 반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접근하도록 하는 것은 공동체적 본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다.
3. 기독교적 인격(person) 개념과 사회기초 관계에 대한 개념
A. 사회적 기본 관계에 대한 네 가지 개념적 모델, 그리고 이것들과 기독교적 인격과 기본관계에 대한 개념사이의 논쟁
공동체 개념은 인격 개념과 연결돼 있기에, 인격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묻는 것 없이 공동체를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연구가 공동체의 독특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 개념과 관련된 인격 개념을 반드시 분석해야 한다. 인격과 공동체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 개념에 대한 중대한 진술을 이룬다. 하나님 개념은 항상 인격과 인격들의 공동체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개념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격 개념 뿐 아니라 하나님 개념과 함께 출발해야 한다.
기독교 인격 개념에 부응하는 사회기본 관계의 개념은 사회기본 관계의 4가지 철학적 모델들과의 논쟁 속에 드러난다.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사회 존재의 존재론적 기본 관계들과 함께 하며, 경험 공동체의 의지와 심지어 사회적 행위들과 함께 한다. 우리가 존재론적 기본 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 이론의 유형이 아니라 선행했던 철학적 유형들을 언급할 것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모델에서 인류(human being)는 단지 이성적 종(species reason))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격이 된다. 인류는 정치적 동물이며, 국가는 모든 개별에 선행하는 집단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개인(individual)은 활동적 정신활동(active mind)과 함께 수동적 정신활동(passive mind)의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성취한다. 그리고 동일하게 플라톤의 Timaeus 따르면, 영혼의 이성적 부분 즉, 보편을 일으키는 그 부분은 불멸한다. 그래서 본질적 존재(essential being)는 개별 인격 존재를 넘어서 있다. 인류와 인류의 본질 사이의 대립은 사회철학 용어 표현인 개별자(individual)와 보편자(universal), 그리고 개인과 종의 대립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하나님 개념은 비인격적(impersonal)이다.
2. 스토아학파는 철학사에 있어서 개인의 영혼의 부분을 통제하는 개념과 함께 윤리적 인격의 개념을 공식화한 첫 번째였다. 인류는 보다 높은 의무(명령)에 복종함으로 인격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의 첫 번째 구별되는 원칙은 스토아 학파에 있어서 ‘나’는 원리적으로 자기 충만 즉, 다른 존재없이 이성의 최고 절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오직 국가 이념을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종들(species)이 최고 이성을 차지하며, 개별은 단지 종들의 한 부분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한 인간은 오직 종의 수준에서, 오직 개별적인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인격(person)은 본성적으로 닫혀있고 완성적이고 최종적인 어떤 것이다. 개별자와 보편자는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은 궁극적인 어떤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사회철학적 기본 관계는 타인에 대한 윤리적 인간의 관계이며, 그래서 항상 동일 종류 사이의 기본 관계로서 이해된다.
3. 에피쿠리안주의(쾌락주의)는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론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사회적 형성이 오직 개개인의 쾌락 증대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와 윤리적 생활에까지 확장한다. 그러므로 사회형성은 순수하게 실용적인 근본을 갖는데 이는 동의로부터 발생하며, 자연 공동체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개별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개별적 쾌락을 수행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것이다. 한 개인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방인이다. 이는 모든 사회형태를 위한 토대이다. 그래서 사회형태들은 순수하게 계약적으로 해석되야 한다.
4. 형이상학적 질문을 인식론적 질문으로 바꾼 데카르트의 변형은 이전 이론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인격 개념을 사용한다. 이것은 칸트의 인격 개념의 인식론적 발전(내가 모든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앎)에 의해 실현되었다. 왜냐하면 초월적 깨달음의 통합이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정신의 고차원적 통일성, 지적인 직관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개요는 근본적으로 보편자 밑에 인격을 포함하기에 인격을 부정한다. 인식론상의 주객관의 관계는 이것을 뛰어넘어 발전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지적 직관, 정신활동의 통일성 안에서 주객의 대립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피히테 조차도 나 아닌(NOT-I)것으로부터 기원한 자인식의 나(I)를 가졌을 때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칸트주의자들의 이해를 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NOT-I는 또 다른 I가 아니라 대상(객관)이기 때문이다. 헤겔 또한 객관적 정신으로 끌어당겨지고, 절대정신으로 드러나는 그 지점에서 일어나는 I와 원칙적으론 개별적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운동(a move)을 가진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정신 개념은 모든 체계들과 연결되어 있고, 내재된 것으로써의 정신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은 필연적으로 관념론에서 도출된 결론에 이른다. 나(I)는 정신적인 한에서 인격이다. 그러나 칸트에 있어서 정신은 모든 물질을 극복하고 포함하는 최고의 공식(formal) 원칙이다.
보편적인 타당성은 인간이 이성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에 최고의 행동 원칙이다. 피히테는 이러한 칸트적 인격 개념을 받아들인다. 인격의 과제나 의무가 성취되었을 때 이성의 목적도 성취된다. 칸트는 경험 사회 관계에 있어서 반작용의 결정적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human species)의 운명은 하나의 정신이나 보편적 이성에 의해 정의되며, 인격들의 다른 활동들에 의해서만 분리되는 인격의 완벽하고 조화로운 영역을 형성되고, 이성의 영역 안에 흡수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같은 존재들의 일치가 공동체의 개념이 아닌 동일함이나 일치의 개념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학적 개념이 아니기에 주,객관의 개요가 사회학적 범주로 인도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기독교적 인격 개념’이라는 용어는 이제 기독교 공동체의 개념을 구성하며 이것을 가정하는 인격 개념을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신학 용어에서 이것은 원초적 인간 상태의 인격 개념이 아니며, 선악은 알지만 하나님과의 한 공동체 안에 있지 않는 타락한 이후의 인격 개념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인격 개념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나중에 말하게될 인간 정신의 실재 즉, 정신의 구조적이고 개별적인 개성(character) 위에 세운다. 개인 정신의 일반적 개념 속에서 우리는 관념적 개념을 극복하고,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절대적인 것으로서 개별적이며 확고한 인격 개념을 보전하는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인식론적 범주에서 사회범주를 추론하는 시도는 다른 범주로 변화해야만 한다. 보편자의 순수한 초월적 범주의 방법으로 다른 주체들의 실재 현존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관념론의 인식 방법은 정신(Geist)의 영역에 속해 있고, 초월에 이르는 방법은 지식의 객관화에 이르는 방법이다. 나는 내 안에 객관을 파악하기 위한 정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 객관은 오직 순수하게 객관으로 남아 있고 결코 주체나 ‘이방인 나(alien I)’로 될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주체는 지식의 객체가 될 수 있으나, 그때 사회적 영역을 떠나 인식론적 영역으로 들어간다.
나의 지성이 배타적으로 보편적 유용성(validity)을 외칠 만큼 탁월한 한, 사람이 지식의 객관을 주관으로 알 때 생길 수 있는 모순들이 나의 지적 능력에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한, 나는 사회적 영역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나의 지적 능력이 어떤 근본적 장벽(barrier)에 직면했을 때 이(사회적) 영역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념론의 ‘객체’는 결국 장벽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장벽의 본성이 아니라, 실재하는 장벽으로서의 경험되어지고 인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실재로서 장벽을 경험하고 인식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관념론이 철저하게 생각지 않았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실재(reality)의 개념이다.
관념론을 위한 본질적 실재는 과정 안에 진리와 실재를 넣는 자기 인식적 정신이고 자기 활동적 정신이다. 그들은 자신이 인격인 한 윤리적이 될 수 있는 위엄을 가지며, 윤리적이길 강요받는다. ‘당위(ought)’와 ‘이다(is)’ 사이의 경계는 전체로서의 인격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관념론이 두 번째 사고를 가졌어야만 했던 그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네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칸트의 말과 더불어, 논쟁은 정신철학의 내재를 위한 윤리적 초월의 영역을 버린다. 한쪽 측면의 인식론 철학의 필연적 결과는 자신의 윤리적 가치를 결정하는, 윤리적 영역 안으로의, 이성 인간으로서 자신 안에 자신들의 윤리적 행위들을 낳는 이성적 인격이다. 그래서 인간 실재 방해물을 여기서 인식하게 되었고 이 인식은 오직 윤리적 영역에서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방해물 자체가 윤리적 내용을 갖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말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지적일 수 있고, 지식의 충돌에서 경험될 수 있다. 여기서의 쟁점은 시간의 문제이다.
칸트는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시간이 정신 직관의 순수 형태였다고 가르쳤다. 칸트와 모든 관념론의 결론은 본질적으로 사유의 영원한 방식이다. 이것은 인식론과 윤리학에서도 명백하다. 피이테는 개별 의무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서 윤리적 실재에 더 가깝게 되었다. 양철학자들에게서 윤리학의 최고 절정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식론이 윤리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게된다. 직관의 순수 형태로서의 시간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에 반박하는 것이 나의 주장이 아니다. 나의 출발점은 다르다. 칸트와 피이테처럼 나는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이것을 요구에 직면해 있는 인간에게 연결시킨다. 언급됨의 순간에 인간은 책임 또는 결정의 상태에 들어간다. 사람에 있어 나는 이점에서 이성과 정신의 관념자의 인간이 아닌 살아있는 개별자인 확고한 개인을 의미한다. 이 인간은 영혼과 가치의 충만이 영원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한가운데 안에서 책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말한다. 또한 영원히 흐르는 시간의 흐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연관된(가치로 가득 찬 것이 아닌)순간 안에 있는 인간이다. 순간의 개념에 안에서 시간 개념과 가치 연관성은 함께 놓여진다. ‘순간’은 책임의 시간이며, 가치 연관의 시간이며, 우리가 말한다면 하나님과 연관된 시간이며 가장 근본적으로는 구체적인 시간을 말한다. 오직 구체적 시간 속에서만 윤리학의 실제 주장이 구속력있으며, 오직 내가 책임적일 때 나는 시간에 묶여진 존재를 충분히 인식한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부터 관념론에는 별 의미 없는, 인간이 시간 안에서 있고, 다시 일어나고 통과한다는 생각이 따라 나온다. 인간은 정적이 아닌 동적이며 항상 그리고 오직 윤리적 책임성 안에 존재한다. 인간의 또 다른 개념은 구체적 인간의 충만한 삶을 파괴한다. 마지막 분석에서 철학이 인간 개념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이유는 죄에 대한 심오한 개념과 하나님의 주의주의적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관념론자들의 인간 개념의 공식화에서의 논리적 결함은 우연이 아니라 체계 안에 뿌리깊은 것이다. 관념론은 운동에 대한 비평이 없다. 게다가 관념론은 인간이 절대적 요구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의 이해가 없다. 관념 윤리학자들은 해야만 하는 것을 알고, 그의 당위성 때문에 항상 진지하게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디에 양심의 고통, 결정들의 무한한 갈망을 위한 공간이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reality)문제에 직면하도록 한다. 이 문제라는 것은 진짜 장벽인데, 이것은 사회의 기본 관계이다. 기독교적 통찰에 의하면 인격은 인간이 책임에 직면할 때, 도덕적 투쟁에 열정적으로 관여할 때, 자신을 압도하는 요구에 직면할 때 창조된다. 즉 실재 인격(real person)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생긴다. 이 직면은 관념론에서처럼 정신 속에서 일어나지만, 정신의 개념은 관념론에서와는 다르다. 기독교 철학에 의하면 인간의 인격(the human person)은 인격을 복종시키는 신격(the divine person)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며(originates), 이 신격은 인격을 초월하여 있다. 관념론적 개인주의자들(Idealist individualism)은 정신을 존재 그 자체(being-for-itself)로 의식하는데 이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기독교적 인격은 오직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완전한 이원성에서 발생한다. 즉 장벽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을 윤리적 인격으로 인식하게 된다. 장벽을 더 분명히 인식하면 할수록 인격은 책임성의 자리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기독교적인 인격은 고차적인 가치의 담지자(bearer)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의 개념이 인격적 존재 즉, 인격의 피조성(creatureliness)에 관계되어 있을 뿐이다. 모든 가치의 철학, 심지어는 인격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Scheler] 곳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격의 가치를 해칠 위험이 있고, 인격이 객관적인 것(objective)의 담지자인 한에서만 인격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위험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인격을 이렇게 다루는 것은 개인적-사회적 기본관계를 이해하려는 가능성으로부터 인격 자체를 차단하게 된다.
구체적이고 윤리적인 타인의 장벽이 인지될 때, 아니면 인격이 그것을 인지하도록 강요될 때, 우리가 인격의 사회적 존재윤리적 기본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명백히 여기서 장벽의 개념은 결정적이다. 그래서 인격적 경험에서 장벽의 형태와 구조가 먼저 분석되어져야 한다. 장벽의 개념은 개별자(the individual)와 보편자(the universal) 사이의 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the person)은 본질적으로 타락하고 죄스러워진 이상 더 이상 그 자체로 개별자(the individual)가 아니다.[Schelling] 개별자(individual)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은 중재없이 정의되어지는 반면에 인격의 윤리적 개념은 윤리-사회의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정의되어진다. 윤리적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체로 중재가 없는 정신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얼굴을 마주보는 타자에 대한 책임성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개인의 윤리적 개념을 사회적 기본관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을 윤리적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타자를 생각하지 않고는 개인을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공동체, 그리고 개인의 상호연결에 관해 맨 처음 말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별자(individual)가 타자(other)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개인이라는 말은 혼자를 의미하지 않고, 반대로 개인이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타자는 무엇인가? 만일 개인을 구체적인 나(I)라고 부르면 타자는 구체적인 너(You)가 될 것이다. 철학적 용어로 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견 모든 너(You)는 너에 대해 주관적인 나를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고 결국 너는 ‘다른 나’와 동일시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타자는 단지 너로써의 나(I only as You)에 의해서만 경험되어 질 수 있지 직접 나로써의 나(I directly as I)에 의해 경험되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간단히 상호교환 가능한 개념이 아니라 특별하고 두드러지는 경험의 범위를 포함한다. 나 자신은 나 자신의 경험의 목적이 될 수 있으나 너로써 나 자신을 경험할 수는 결코 없다. 나는 결코 나 자신에게 실제적인 장벽이 될 수 없고 타인에게 장벽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성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인격의 근본개념이다. 형이상학적 개인의 개념은 윤리적 인격개념과 달리 ‘직접성’을 가리킨다.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마음이 아니고 다만 ‘타자’에 대한 책임성에서만이다. 개인은 단순히 혼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이 존재하기 위해서 타자는 필수적이다. 만일 개인을 구체적인 나(I)로 상정한다면 타자는 구체적인 너(You)일 것이다.
B. 나-너 관계 방법에 따른 하나님 개념과 사회기본관계들
이곳에서 우리의 관심은 사람, 하나님, 그리고 사회적존재 각각의 상호 관계이다. 나(the I)는 너(the You)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가 된다. 요구에 응답함으로써만 책임성은 일어난다. ‘너’는 자기 존재 자체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요구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 요구는 절대적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인(the whole person)은 이 절대적인 요구에 의해 요청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 인간을 창조자가 되게끔 하는데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가? 나를 윤리적으로 책임적인 인격이 되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써의 너와는 관계없다. 여기서 우리는 너라는 인간의 의지와 독립적인 것을 추가한다. 하나님 혹은 성령이 구체적인 너와 연결된다. 오직 하나님의 역동적인 역사를 통해서 타자가 나에게 너가 된다. 여기서 참 나가 발생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적인 너는 신적인 너의 이미지이다. 사실 너-캐릭터는 신적인 것이 실현되는 본질적인 형태이다. 모든 인간적인 너는 자체에 신적인 미덕에 의해서만 너-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것은 신으로부터 빌어온 속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너가 아니다. 오히려 신적인 너는 인간적인 너를 창조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너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고 주관되기에 신적인 너와 같이 실제적이고, 절대적이고 거룩한 너이다.
사회적 관계들은 순수하게 인격상호간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하고, 인격들의 유일성과 분리성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인격은 비인격적 정신에 의해서 정복당할 수 없다. 어떠한 ‘일치’도 인격들의 복수성을 무시할 수 없다. 사회 기초범주는 나-너 관계이다. 타 인격의 너는 신적인 너이다. 결국 타인격의 너를 향하는 길은 신적인 너를 향하는 길과 같다. 그 길은 인지 혹은 거역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개인은 ‘순간’에 타자를 통해서 때때로 인격이 된다. 나의 타 인격과의 진짜 관계는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안에서만 하나님의 ‘나’를 알기 때문에 타 인격과 함께하기가 쉽지는 않다. 여기서 교회의 개념이 가동되기 시작한다. 교회는 기독교적 인격을 분명하게 되도록 할 것이다. 인격은 하나님이 너라는 인격을 대면할 때가 아니라 나라는 인격에 침투해 들어올 때에만 그 본성이 성취된다.
이곳에서 본회퍼는 사회성이 기독교가 가르치는 인격의 근본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본회퍼의 주요 관심은 “사회적 존재의 존재적 기본관계들”이다. 여기서 사회적 존재인 인격의 기본 범주가 ‘나와 너의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 이 인격 개념이 공동체 개념을 구축한다. 그리고 본회퍼는 이 인격 개념을 계시에 근거한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밝히려고 노력한다. 존재론적 사회철학적 인격개념의 규정들에 대해서 비판하며 계시적인 면에서 인격개념을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4. 본래의 상태와 공동체의 문제
A. 방법론적 문제들
만약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계시가 옛인간 아담으로부터 새인간 그리스도 즉 교회를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만약 내가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참여된 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깨어지지 않은 본래의 상태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2장의 내용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원형을 그린다. 신학적 문제가 제법 어렵게 보일 동안에 방법론적 주제들이 좀더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본래의 상태에 대한 교리가 사회 철학과 사회학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사회철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문제들이 신학의 콘텍스트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그 문제들이 창조의 기초가 일반적으로 필수적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 안에서 전제되어졌고 포함되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점에서만 그 문제들은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방법론의 관점은 연구를 통해서 간직되어져야만 한다. 이방법의 신학적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본회퍼는 사회성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신학적 방법론을 이용할 것을 강조한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근거해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주며, 사회적 존재라 함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원래의 인간은 하나님께 봉사하는 인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B. 사회철학적 문제: 인간의 정신과 사회성
본회퍼는 이 단락에서 인간의 정신성과 사회성 사이의 관계를 다루려고 한다. 이 부분은 제베르크의교리학의 방법론과 내용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정신(spirit)으로서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창조되었음과 그 인간의 일반적 정신성이 사회성의 그물로 엮어져있음을 보여준다. 이 기초 위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관한 문제, 교회라는 종교적 공동체의 문제들을 명료하게 해 주는 통찰력을 발견하려고 한다.
1. 구조적으로 열려있는 인격적 존재
사회-철학적 영역에서의 고찰은 신학적 영역과는 다른 영역에서의 고찰이다. 본회퍼는 이 고찰에서 “인간의 정신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 즉 인간의 정신성이 사회성 안에서 가능한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만일 자기인식이 타자와 함께만 일어난다는 것을 보이려 할지라도 이것을 기독교적 나-너 관계와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공동체의 영역에서 인간은 타자를 이해하고, 타자에게 표현하고, 타자에 의해 이해되는 존재이다. 이 세 가지 경험들은 함께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모든 정신적 행동에 적어도 잠재적으로 현재해 있으며 모든 정신적 행동들은 잠재적으로 사회성과 묶여진다. 인간이 가장 고립된 것으로 생각하는 느낌의 생활에서도 역시 인간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가 느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인간이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느낌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또한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회성이 포함된다. 본회퍼는 인간이 사회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회성의 증거로 말(language)와 의지(will)를 예로 들고 있다.
인격적 존재의 개방성에 대해서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간 정신은 전적으로 사회성에 의해 짜여지고 나와 너라는 기본관계에 의존한다. 인간의 정신은 오직 서로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보여진다. 이것이 정신의 본질이다.”라고 하여 인격은 구조적으로 열려져 있음을 밝힌다.
2. 구조적으로 닫혀있는 인격적 존재
개인의 개방성이라는 생각은 그 반대인 비개인적 정신으로 변화될 우려가 있다. 정신이 존재에 다가오면서, 나는 정신을 둘러싼 바다에 빠져든다; 나는 스스로가 정신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들 깨닫고 발견하게 된다. 나는 정신 안에서만 살 수 있고, 나는 자신이 마주치는 모든 너가 동일한 경향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이 발생하는 특정한 유형은 너-유형인데, 말하자면 인류가 실제로 그들의 나와 오직 너-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명백하게 객관적인 정신의 일정한 양을 저장하거나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만큼 더 생산하는 거대한 사회 유기체의 활동적인 구성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너 관계는 전혀 있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정신이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개인의 정신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개인의 정신이 객관적인 정신이 흐름에 빠질 것이고, 인격의 정신이 객관적 정신의 생산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빠져듬 은 틀림없이 개인의 정신을 강화한다.
따라서 인격의 개방성은 상관관계로서의 폐쇄성을 요구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개방성에 대해서 전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통일성이 폐쇄되었다는 사실은 자아의식과 자기결단이 모든 사회로부터 구별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서 증명된다 ; 이러한 행위들은 안쪽으로 향한다.
사회적 의도는 구조적 폐쇄성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어떠한 개인적 행동도 개방성과 관계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의도가 개인의 개방성을 향해 방향지워지고 있으며, 개인의 행동은 개인의 폐쇄성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접근하기 힘든, 전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마음 중심부로부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완전히 개방된 layer 를 구분해내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나의 구조적 통일성은 너의 경험 안에서 이미 경험으로 주어진다. 너는 나 없이 경험되어질 수 없기에 인식론적 패러다임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이상적 철학에 의해서 제기되는 나와 너에 관한 하나의 질문 – 이른바 정신영역의 종합에 관한 피히테의 질문은 잘못 제기된 것이다. 그 물음은 나와너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개인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가 동일한 비중을 갖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회 단위는 인격의 상호작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 단위가 이들 상호작용만으로 구성되는가?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개별적 인류가 공동체 안에 흡수되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인격만을 의도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공동체와 인격 모두를 그들의 독특한 중요성을 의도한 것인가? 객관적 정신이 주관적 정신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운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아니면 양자가 하나님의 의지아래 나란히 서 있는가?
만약 사회와 인격의 동일한 비중을 견지한다면, 개별자에 관련된 형이상학적 단위로서 공동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공동체가 개별자로서 동일한 구조를 지닌 인격들의 집합체로 해석될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한다.
공동체는 구체적인 통일체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분리된 개별자들로 파악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활동성의 중심부가 각 인격에게 놓이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곳에 놓이기 때문이다. 활동성의 중심부로 이해되어지는 집합적인 개인은 특별한 목적을 지닌 구체적인 공동체일 때 가능하기에, 집합적인 인격은 각각의 인격이 구체적 공동체의 본질에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아직까지 집합적인 인격의 실제성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실재성의 문제는 윤리의 관점으로부터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에, 우리는 먼저 윤리의 범주가 윤리적 개성이라는 점에서 집합적 인격에 적용될 수 있는 수준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작업은 교회의 개념을 위한 결정적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집합체와 단일체는 하나님의 눈에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본 관계들은 종교적 공동체와 교회라는 개념에 계속 나타난다.
C. 사회학적인 문제
1. 의지의 공동체로서의 사회적 공동체
인간 공동체 그 자체는 의식적인 인간 정신이 작용하는 곳에 실재한다, 즉 공동체는 의지라는 의도적 행위에 기초를 둔다. 인격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의지 공동체이다. 따라서 공동체들의 구조와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의 행위를 연구하는 것. 즉 현상학적이고 조직적 연구분야로서 연구라고 사회학의 목적을 정의하는 것은 정당하다.
우리는 먼저 사회적 연대의 본성만을 기술하고 그리고 나서 의지의 사회적 행위와 구조들의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 설정해야 한다. 오직 공식적인 계약에, 일반성에 기초하고 있는 공동체들은 의지의 공동체가 아니고, 반대로 매스(mass)라는 혹은 public 이라는 사회학적 범주 하에 있는 것으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의지의 통일성은 계획되어지고 의도되어진 내용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통일성은 공동체의 의도에 반드시 존재하는데, 말하자면 계약이라는 의미의 형식적 통일이다.
의지의 공동체와 의지의 통일성은 오직 나와 너의 내적인 분리라는 토대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 사에는 개별적인 인격체들로서 피조물이라는 경계가 놓여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라는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공동체의 이러한 해석에 기초 할 때만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는 나-너 관계의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의 통합, 즉 신비적인 융합이다.
공동체는 의지의 공동체이고, 인격들의 분리와 상이성 위에 세워지고, 의지의 상호 작용들로 구성되며, 그것의 통일성을 의도되어진 것 안에서 발견하며, 그것의 기본적 법칙 가운데서 개별 의지들의 내적인 충돌을 포함한다. 이러한 정의는 객관적 정신의 이론을 논할 때까지는 불완전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지들 사이의 유대를 결정하는 내용들을 면밀히 살핀 다음에만 가능할 것이다.
2. 사회적 공동체들의 유형학
의지들 간의 연대는 의도된 목적과 공동체의 형태를 향한 의지간의 관계라는 관점으로부터 고려되어질 수 있다. 즉 의지의 방향결정에 의한 것이다. 의지의 방향을 분석하는 것은 동시에 폐쇄성과 연대의 이완을 동시에 설명하는 것이다. 의지들간의 유대를 관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의지의 힘의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모든 의지는 목적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의도된 목적과 공동체를 향한 의지 사이의 관계라는 이중의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의지는 각각 현상학적으로 다른 형태를 갖는다. 의지들은 “함께” , “제외하고” , 그리고 “대항해서” 의도될 수 있다. 첫째는 경험적인 사회 형태로 이끈다. 둘째는 사회학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셋째는 완전히 순수한 형태로 발전한다면, 실제적인 사회의 생명을 창조할 수 있으나, 사회 형태를 창조할 수 없는 상태로 머물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오직 첫번째 형태만이 의미가 있다.
현대의 학자적인 용어들에 의하면 첫번째 유형은 community 로 두 번째 유형은 society 로 명명할 수 있다. 가족, 민족, 그리고 교회는 첫번째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사단법인, 동아리, 그리고 교파는 두 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는 근본적으로 옳지 않다. 쉬러가 모든 공동체들은 생명 공동체라고 부른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옳다. 모든 생명이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일시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인격적인 존재를 위해 의도된 인류가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공동체안에 있는 어린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의 의지의 일부분이다-그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의도할 수 있을때까지는. – 이러한 생각은 society에서는 어리석은 것처럼 생각된다. 이러한 통찰은 교회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만약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생명공동체라면, society는 이성적 행동의 결합체(association)이다. 단체(society) 안에 존재하는 의지들의 결합이 없는 공동체(community)는 없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의지들의 결합이 없는 공동체가 없는 것은 (society)단체가 본질적으로 (community)공동체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는 방향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서의 의지에 중점을 두었다. 이제 제기 되는 문제는 서로를 향하는 의지들의 힘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힘의 관계로서 또는 규범들의 관계로 나타날 수 있다.
협동의 개념은 오직 힘의 관계에서 적용될 수 있고 공동체의 개념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용어가 그 구성원들의 법적 동등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협동은 법적인 용어이지 사회학적인 용어가 아니다. 이 용어는 살아있는, 사회적 관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의 추가적인 사회형태가 있는데, 이것은 공동체라는 일반적인 개념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의식적인 존재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형태로 불릴 수 있다. 나는 매스(mass)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매스(mass)는 아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매스 안에서는 의지의 어떤 실재적인 사회적 결속력이 없다.
3. 객관적 정신(Objective Spirit)
본회퍼에 따르면 두 개의 의지가 서로 만날 때 구조를 형성한다. 이 구조를 구체적 전체성(concrete totality) 혹은 객관적 정신(objective spirit)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전체성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직관과 지각할 수 있는 경험에 입각된 것이다. 사람들 스스로 그들 위에 일어나고 있는 그들 자신의 바깥에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써 그들의 공동체를 경험한다.
공동체에서 개인(individual)은 그들의 객관화하는 자신들에 의해서 직면한다. 객관적 정신(objective spirit)에서, 역사적 비판(thrust)과 확장(expansion) 앞에 객관적 정신의 사실성의 현실과 교제의 현실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정신은 역사적이며 공동의 의미 사이에,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한 공동체의 목적 사이에 연결로 여겨지는 것이다. 객관적 정신은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효과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individual)인 형태이다. 그것은 개인적(individual)인 인격들을 넘어서 개인적(individual)인 삶에 이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들을 통하여 실재한다. 그것은 그 의지의 사회적 실현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연속성을 뜻한다.
근본적으로 공동체로부터 분리되는 한 개인(individual)은 더 이상 객관적 정신을 경험할 수 없다. 객관적 정신은 사회와 공동체 양쪽 안에 존재한다. 사회에서 목적(end)을 위하는 수단(means)은 공동체에서 상징이다. 사회의 객관적 정신은 그 자체 가치로서 단언할 뿐만 아니라, 목적을 위하는 수단으로써 단언한다; 그것은 객관적 목적의 구조이다. 이 경우에, 객관적 정신의 생산성은 수단의 체계(system)를 넓힌다.
역사와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종말론적인 특성인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까지’이다. 우리가 혈족과 씨족의 자연적인 공동체, 국가와 같은 역사적 공동체, 결혼과 우정과 같은 것으로 삶을 구체화하는 공동체를 생각하든지 간에, 이것은 인간 공동체의 사람의 ‘거룩성’을 위한 기초이다. 이 거룩성은 이 삶의 구조 모두의 근본적인 불변성(indissolubility)을 드러낸다. 대조적으로 사회의 관념은 그것의 구성적인(constitutive) 목적의 관념 넘어서 결코 넓히지 않는다.
두 가지의 사회적 형태의 가장 깊은 차이는 공동체의 객관적 정신에 있는 개인적(individual)인 특성에 돌릴 수 있다. 개인(individual)과 객관적 정신의 서로 의존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인(individual)적 정신은 객관적 정신 안에 산다. 객관적 정신은 그 자신의 삶을 산다. 그러나 개인(individual)의 삶은 헤겔이 “정신은 실재를 가지고, 개인(individual)은 그 우연성이다”라고 쓸 때 그가 의미하는 의식(sense) 안에 흡수되는 그러한 방법은 아니다.
공동체는 사랑과 동정과 나누는 기쁨 등을 경험하는 그 자신의 활동의 중심과, 다른 개인 인격들과 나란히 같은 사회적 책임과 단자의(monadic) 이미지의 의식(sense)에서 그 자신의 행동의 방법을 가진다.
어째서 사회는 인격적 성격을 부여할 수 없는가? 여기서 객관적 정신은 다만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만 고려되어 있는데 인격은 결코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의 모든 관계는 완전한 상태, 즉 사랑의 공동체이며, 이 사랑의 공동체는 본래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인격들은 자의식적이며 자발적이다. 그러나 또한 개인적인 특성이 사회에 귀착될 수 없는 이유가 명백하다. 사람이 목적(end)을 위한 수단(a means to an end)일 수 없는 동안, 그 객관적 정신은 단지 목적(end)을 위한 수단(a means to an end)으로서 보여진다.
우리는 육체를 가짐으로써 모든 인격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육체(body)’는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없고 오직 주관적으로 경험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체적 육체(physical body)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사도 신조에서 ‘살(flesh)’). 신체적 육체(physical body)는 죽거나 혹은 살아있거나 같은 객관적 외관을 가진다. 그러나 후자는 단지 ‘육체(body)'이다. ‘육체(body)'는 나의 대한 관계에서 존재한다; 내가 그 소유로써 경험하는 것은 신체적 육체이다. 나(the I)는 내부에 육체와 연결되어 있고, 일정한 범위에서 그것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은 활동의 공동체의 중심이 공동체가 단언하여 온 그 일원들 모두를 경험하는 같은 의식(sense) 안에 있다. 공동체 의지의 관념(idea of a community of will)은 이것을 구별시키고 유기체 관념으로부터 육체를 분리한다. 육체의 개념은 보여질 것으로써 교회의 개념을 위해 중요하다.
매우 자주 강조되는, 개인들의 다양성(diversity of individuals)과 구조의 분리(structural separateness)에 기초하는 의지의 공동체를 가진다는 것은 아마도 최후로 통일(unity)이 된다. 아직 이 새로운 통일성은 명확한 상호간의 공동체의 운동을 폐지하지 않는다. 개인 인격들은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하게 남는다. 비록 같은 시대에서 기원적으로 의지하지만, 모든 인격은 형이상학적으로 개인들에 관하여 자율적이다. 통일성(unity)과 공동체(community)는 서로 배타적이지도 또한 동일하지도 않고, 각자가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최초의 상태에 대한 교의의 토론 안에 이상의 사실을 포함하기 위한 신학적인 이성(reason)은 우리가 숙고하였던 공동체 관계들 모두가 완전(integrity)의 상태에서 상상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원래 것의 범위에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인 정신적 형태(spirit-form)와 경험적 공동체인 자연적 형태(nature-form)는 서로 보완하여서 창조되어진다; 이것은 경험적 공동체의 자연(nature)에 관해서 결말(conclusion)을 내는 것을 인정한다.
5. 죄와 깨어진 공동체(Sin and Broken Community)
죄의 세계는 ‘아담’의 세계, 옛 인간성(old humanity)의 세계이다. 그러나 아담의 세계는 그리스도가 화해시켜서 새로운 인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만든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의 인류가 그리스도의 인류 안에 사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문제에 대한 토론이 성도의 교제를 이해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이 장의 본질적인 과제는 나와 인류 사이와 마찬가지로, 죄의 개념에서 고유한 나(I)와 너(You)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기본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의 정신적 형태(spirit-form)는 사랑에서 생기지만, 타락은 사랑을 이기주의로 바꾼다. 이것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공동체 안에서, 마찬가지로 인간 공동체 안에서 파괴하는 근원이 된다. 이 방향의 변화와 함께 공동체의 전체 정신적인 적응은 바뀌어진다. 그들의 고유한 의식에서 도덕과 종교는 인간의 본성에서 사라진다. 최초의 상태에서는 인간 존재들 사이의 관계가 주는 것인데 반하여, 죄의 상태에서는 순수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인격은 완전한 자발적인 고립으로 존재한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 같이 살기보다는, 모든 인격은 그들 자신의 삶을 산다. 이제 모든 인격은 그들 자신의 양심을 가진다. 본회퍼에 따르면 창조시에는 인간에게 양심이 없었다. 오직 타락 이후에 아담은 선하고 악한 것을 알게 되는 양심을 가지게 되었다. 본회퍼에 따르면 양심은 그리스도가 법을 통하여 급소를 찌르는 터로써 차라리 인간의 자기 정당화의 최후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고독 속에서 신적 법을 듣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인간 존재는 윤리적 고립 안에서도 불구하고, 윤리적 인간으로써 다시 삶에 정착한다. 모든 공동체의 자연적인 형태(natural forms)는 남지만,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핵심은 부정하다(corrupt).
죄는 초개인적인 행위(supra-individual deed)와 개인의 행위(individual deed) 양쪽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행위와 개인의 행위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신학적 논리(the logic of theology)에 의하여 죄의 보편성(universality)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둘째, 인류의 구석구석에 죄의 경험적인 퍼짐은 어떻게 개념화될 것인가? 그것은 죄의 사회적 중요성의 관념이 신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원죄의 교의(doctrine original sin)에 있다.
A. 원죄의 교의(The Doctrine of Original Sin)
원죄론은 죄가 모든 인류를 통하여 퍼지는 것과 원죄(original sin)가 퍼지는 방법을 연구한다. 그 다음에 인간 존재들이 타락한 지위(status corruptionis)(혹은 타락한 상태)에 어떻게 함께 속하고, 함께 속박되는지를 상술한다.
개인의 과실(culpability of the individual)과 죄의 보편성(universality of sin)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즉, 개인의 과실적인 행동(culpable act)과 인류의 과실이 개념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인류가 종(species)의 생물학적 개념에 의하여 이해될 때, 과실의 개념의 윤리적 중대함(위험, gravity)은 약화된다. 기독교의 과실의 개념이 종(species)의 생물학적 개념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종(species)의 개념은 과실의 개념에 기초해야 한다(vice versa가 아니라)
인류(human race)의 윤리적이며 모든 개념(ethical collective concept)까지 나아갈 때 인류의 죄의 관념을 온전히 정의할 수 있으며, 그때에 개인는, 윤리적 타당성을 위한 필요조건인, 자의식(self-conscious)과 자발적으로(spontaneously) 행동하는 인격으로써 확립되어진다. 그리고, 인류(human race)는 그러한 사람들로 구성됨(consisting)으로써 이해되어진다. 인류(human race)의 죄의 관념과 개인의 죄의 관념은 인류(human race)의 기독교 개념의, 인간성(humanity)의 견해(standpoint)에서 토의되어져야만 한다.
사람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하는 것 없이, 즉,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 없이 개인(individual)의 과실있는 행동과 인류(human race)의 유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어거스틴(Augustine)은 분명히 모든 개인 행동에 대한 기초로써 죄있는 집합적 행동을 생각했다. 모든 것은 분명히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 없이(without making the one the reason for the other), 죄있는 개인의 행동(sinful individual act) 안에서 전체의 행동을 발견하는 것에 의존한다. 윤리적 범주(an ethical category)는 구체적인 인격(a specific person)으로써 개인(the individual)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사회적 요소(social element)는 그 때문에(thereby)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긍정적으로 가정되는(posited) 것이다. 개인 존재의 덕(virtue of being)에 의해서, 인간 존재(the human being)는 역시 인류(human race)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사회적 범주에 관하여 인간 정신(human spirit)에 정당한 정의(definition)이다.
죄있는 행동에서, 개인의 정신이 하나님에 대항해서 일어날 때, 정신적인 개성의 최대한 높이 오르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개인 자신의 행위이므로,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해서 야기된다.) 명확한 태도를 가진 행위(the deed committed)는 인류(human race)의 행위인 동시에 (더이상 생물학적 의식 안에 있지 않고) 개인 인격 안에 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사명뿐만 아니라, 인류(human race)의 일원으로써 일반적인 사명을 저버린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성(humanity)은 각자의 죄로 타락하며, 이 원리에서 우리중 한 사람도 아담과 같다; 즉, 모든 사람은 ‘최초의(first)’ 죄인이다. 동시에, 개인들(individuals)과 인류(human race)의 이 관계는 사회 철학의 부분에서 소개하는 단자의 이미지(monadic image)와 일치한다. 거기에서 각 개인 단자(individual monad)는 전체 세계를 ‘대표한다(represent)’.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개인적 과실의 의식과 우리의 행위 보편성의 의식을 연결한다. 모든 행위(deed)는 개인 행위(individual act)와 인간성(humanity)의 전체의 죄(total sin)를 다시 각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죄(individual sin)와 함께(along wiht) 그리고 그 안에(in) 긍정적으로 가정됨(posited)으로써 죄의 보편성을 확립한다. 개인과 인류(human race) 사이의 연결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인 유죄의 경험(the experience of common sinfulness)이라고 불리는 것에 이르게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성(God's holiness)과 마주 대하여 완전히 홀로(utterly alone) 서 있음으로 “나는 입술 더러운 사람이며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가운데 산다.”고 선언한다. 그는 그것에 의하면 그의 개인의 과실에 대해 스스로 무고함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의 유죄(guiltiness)와 전체 사람들의 죄(the sin of the whole people)가 그의 안에서 자각된다는 의식(consciousness)을 결합시킨다. 그의 죄가 전체 사람(whole people)의 죄와 매우 가까이 연결되어(connection) 있다.
윤리적 결속의 경험과 최악의 죄인(peccator pessimus=the worst sinner)으로써 자의식(awareness of oneself)은 함께 속한다. 윤리적 결속(ethical solidarity)의 경험은 최대한 사람의 특성에 기초된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결속(solidarity)의 인식(awareness)에서도, 죄에 기인하는 개인 인격(individual persons)의 존재적 윤리학(the ontic-ethical)의 분리(separateness)는 결코 끝날 수 없고, 의식(consciousness)으로부터 사라지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자아(the self)의 경계(boundaries) 피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의 길(a sinful way) 위에 묘사하지만 그 안에서 현실화하는 나와 너의 관계(I-You-relation)에 직면한다. 죄의 길의 ‘이김(overcoming)’은 오직 교회의 개념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내(I)가 너(You)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덧붙여야 하며, 또한 그것이 인류(human race)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B. 윤리적 모든 인격들(Ethical Collecive persons)
만일 죄의 주체가 개인과 인류(human race) 양쪽이라면, 사람들은 ‘아담 안에 있는 인간성’의 통일(unity humanity-in-Adam)의 사회적 형상(sociological form)으로 이해되는 것이 요청된다. 윤리적 인격(ethical person)으로써, 즉, 존재(being)의 구체적 상황(the concrete situation)에서 그것이 너(a You)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곳에서 모든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활동의 증명된 중심(a proven center of activity)일 것이다.
의미(the meaning)와 부름의 현실(the reality of such a call)은 경험적인 공동체(empirical community) 안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자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의 개념이다. 부름(the call)은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인격에서 온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the people of God)으로써 참회(penance)해야만 한다. 그들은 개인들(the individuals)이 아니라 죄에 떨어진 사람들(the people)이다. 또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도 백성들이었다.
개인(individuals)들이 부름받는 곳에서, 그들의 역사(their history)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부름받는 곳에서, 역사 안에서 그들의 목적(their purpose)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God's will)는 일한다. 개인들(individuals)과 마찬가지로 사람들(people)과 함께 하나님의 의지(a will of God)가 있다.
하나님은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우정, 모든 결혼, 모든 가족, 아무리 작다할지라도 모든 공동체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관계된다. 그리고, 이 의식(this sense)에서 하나님은 또한 교회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인(individual) 독일인들(Germans)과 개인적인(individual)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의 과실(culpability)뿐만 아니라, 독일과 교회의 과실(culpability)도 있다. 그러므로 개인들(individuals)만 회개하고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Germany)과 교회(church)가 같이 회개해야하고 정당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까지’이며, 영원한 의미를 그 자체에 품고 있는 공동체(the community)는 과실 있는 공동체를 뜻하며(willed), 과실이 야기되며(created), 과실이 있어 왔다(has become); 그것은 회개(repentance)를 추구해야만 하며(must seek),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를 믿고 경험하며, 심판(judgment)과 시간의 한계(the limits of time)에서 은총(grace)을 경험한다. 이것은 오직 개인들(individuals)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부름(the call)을 듣는 것(hearing)은 오직 이 방법(this way)에서 구체적으로(concretely) 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개인들(individuals)이 아니며, 개인들(individuals) 안에서, 전 공동체가 그것을 듣고(hear), 회개하고(repent), 믿는다(believe). 그러므로 공동체(a community)의 집합적인 과실(the corporate culpability)은 공동체(the community) 내에 사회적 상호작용(social interactions)에서 발견되는 과실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one man) 안에서 인간성의 전체(whole of humanity)를 볼 수 있으며 화해시키실 수 있음으로써, 하나님은 소수(a few) 안에서 전체 사람(the whole people)을 볼 수 있다(창18:32). 여기에서 대리직의 대리 행동(vicarious representation action, = Stellvertretung)의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인격(the collective person)이 말을 들을 때 (“들을 귀를 가진 자들은 성령이 교회에 말하는 것을 들으라,” 계시록 2장과 3장), 개인적 인격(individual persons)의 양심(conscience)도 말을 듣는다. 그러나, 각 사람은 오직 하나(one)의 양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인격(the collective)의 특별한 일원(particular member)으로써, 그리고 한 개인(an individual)로써 그들 각자가 받는다.
사람(people)은 내부에 통합된 존재(integrated beings)로써 자신을 알아야만 하고, 그에 따라서 결정한다. 그들은 모든 인격(collective person)의 구체적인 요구(the concrete demands)에 자신이 맹목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지의 내부 결정(an integrated decision of their own wills)에 도달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야 한다. 윤리적 공동체(ethical community)는 오직 그러한 내적인 사람(integrated people)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적인 인격(integrated person)의 전적인 과실(the utter culpability)은 단체의 과실(corperate culpability)의 구체적인 형태(the concrete form)이다.
모든 인간 존재(every human being)가 아담인 한에 있어서 모든 인격(the collective person)은 하나의 양심(one conscience)을 가진다. ‘아담 안의 인간성’(humanity-in-Adam)의 구조는 전체(the whole)로써 죄를 짓는 인간성(the humanity)으로써 유일무이(unique)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고립된 개인들(many isolated individuals)을 조립하면서 하나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인격(a collective person) 즉, ‘그리스도가 교회공동체(church-community)로써 존재하는(existing)' 모든 인격(the collective person)에 의해서 오직 대리될 수 있는 ‘아담’이다.
죄(sin)는 첫째 아담(the first Adam)에, 즉 옛 인간성(the old humanity)에 속하는 표시(sign)이다; 유죄(guilt)의 의식(consciousness)은 그들의 모든 죄인들(all sinners)과 연결된 개인들(individuals)을 드러낸다.
개인들(individuals)은 그들이 아담의 인간성(Adam's humanity)에 속하는 것을 인지할 때, 그들은 죄인들의 공동체(the peccatorum communio = commnity of sinners)에 참가한다. 비록 개인(individuals)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구성되지만, ‘죄의 인간성(the humanity of sin)’은 하나(one)이다. 그것은 아직 무한히 산산이 부서지는(infinitely fragmented) 모든 인격(a collective person)이다. 모든 개인들(all individuals)이 자신들(themselves)과 아담(Adam)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담(Adam)이다. 이 이중성(duality)이 아담의 본질(essence)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인간성(the new humanity in Christ)의 통일성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폐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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